
악을 쫓는 신앙인, 그리고 버려진 자의 이야기
영화는 1999년 강원도의 외진 산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한 집안에 쌍둥이 자매가 태어나지만, 한 명은 다리가 기형으로 태어나자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워하며 외양간에 가두고 이름도 붙이지 않는다. 어린 아이는 외진 곳에서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속에 자라며 '그것'이라 불리는 존재로 잊혀진다. 이 오프닝은 단순한 공포의 서막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내는 배제와 낙인'의 서사를 암시한다.
시점은 20여 년 후 서울로 이동한다. 불교계에서 활동하는 박목사(이정재)는 신흥종교 단체 '사슴동산'과 관련된 각종 비리와 의문의 사건을 조사하다 점차 거대한 음모의 실체에 다가간다. 표면적으로 '사슴동산'은 자비와 치유를 설파하는 종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교주 김제승(이원근)의 카리스마와 교리 왜곡, 신도 세뇌, 폭력적 통제로 지배되는 집단이다. 박목사는 단순한 종교 비리를 넘어 연쇄적인 살인과 실종, 집단적 광기의 흔적을 목도한다.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다른 축에는 정나한(박정민)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불우한 사건을 겪고 불교계의 도움으로 성장했으며, 예민한 직관과 불가적 감수성을 지닌 청년이다. 정나한은 우연히 이상한 환상과 직관을 통해 사건에 얽히게 되고, 박목사와 만난 이후 두 사람의 수사는 맞물려 거대한 퍼즐을 완성해간다. 조사 중 두 사람은 ‘사슴동산’이 단순한 사기나 권력욕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공포와 믿음을 먹이 삼아 증식하는 시스템임을 깨닫는다.
수사가 심화될수록, 두 사람은 사건의 뿌리가 강원도의 외양간에서 시작된 오래된 비밀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을에서 버려졌던 '그것'이라는 존재는 언론과 제도권이 외면해온 상처와 공포의 상징이며, 그 존재를 둘러싼 신화와 소문은 교주 김제승에 의해 교리로 재구성되어 교단의 통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김제승은 불교의 일부 상징을 교묘히 전유하여 자신을 종교적 구원자로 포장했고,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구원을 구하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박목사와 정나한은 외양간에서 '그것'과 직접 대면하게 된다. 그 순간 드러나는 진실은 단순한 초자연적 공포가 아니다. 인간의 오만과 공포가 만들어낸 허상, 그리고 그 허상을 이용해 권력을 쌓아온 자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그것'은 영화가 처음에 관객에게 주입하려 했던 '괴물'의 이미지와 달리, 오히려 인간 사회의 위선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존재로 재해석된다.
결말부에서 박목사는 모든 증거와 진실을 마주한 뒤에도 명쾌한 해결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사바하'를 읊조린다. 그 주문은 악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모든 질문에 답하는 선언이 아니다. 대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되, 그 앞에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의 표현이다. 영화는 악을 완전히 소거하는 결말을 택하지 않고,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남긴다.
상징과 메타포
사바하는 상징과 메타포로 가득한 영화다. 감독은 장면 하나하나, 사물 하나하나에 종교적·철학적 의미를 부여해 이야기를 확장한다. 첫째로 주목할 상징은 사슴이다. 불교 전통에서 사슴은 부처의 설법과 관련된 '녹야원'의 사슴에서 유래해 진리와 깨달음을 상징하지만, 영화는 이 상징을 전유해 '왜곡된 믿음'의 도상으로 활용한다. '사슴동산'이라는 이름과 벽화를 통해 사슴은 순수한 진리의 표상이 아니라, 교주가 포장해 유통하는 신화적 상품으로 전락한다. 이는 종교 상징이 어떻게 권력화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둘째, 영화의 결정적 공간인 외양간은 매우 복합적인 은유다. 외양간은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가 숨어 있는 장소로, 문명 바깥에 있는 '부정의 축적 장소'로 기능한다. 외양간에 갇힌 존재는 사회가 만들어낸 '낙인' 그 자체다. 감독은 이 공간을 통해 사회 구조가 어떻게 희생자를 만들고, 그 희생자가 다시 사회적 공포의 원천으로 간주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외양간은 또한 억압된 기억과 죄의식이 저장되는 은닉된 장소로 읽을 수 있다.
세 번째로, 쌍둥이와 쌍의 이미지는 선과 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정상과 배제된 것 사이의 경계를 드러낸다. 하나는 사회적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고 하나는 버림받는 이 대비는 '선악의 절대성'을 허문다. 영화는 쌍둥이의 존재를 통해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을 환기한다. 어떤 존재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조건과 맥락 속에서 의미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목의 주문 '사바하'는 영화 전체의 철학적 메시지를 함축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종결어가 아니라 '수용의 태도'를 의미한다. 박목사가 마지막에 '사바하'를 읊조리는 장면은 현실의 모순과 악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제거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으로 읽힌다. 즉, 영화는 해답을 제공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며, 상징을 통해 관객에게 사유의 틈을 남긴다.
사회적 의미
사바하의 사회적 의미는 종교 비판을 넘어선다. 영화는 '믿음'이라는 인간적 행위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오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슴동산' 교주는 불안을 가진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권력을 축적한다. 이는 현실에서 종종 목격되는 '종교의 상품화' 또는 '종교적 권력화'를 은유한다. 특히 불확실한 시기에는 사람들이 초월적 위안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커지며, 이 점을 악용하는 집단이 출현한다는 사회학적 진단을 영화는 드러낸다.
또 영화는 배제와 표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외양간에 갇힌 '그것'은 사회가 두려워하고 무시해온 존재다. 그 존재는 실제로 괴물이라기보다, 사회가 만들어낸 피해자다. '괴물'의 이미지는 종종 물리적 실체보다 사회적 맥락에서 창조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악'의 사회적 생성 방식을 비판한다. 즉, 악의 기원은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과 배제의 메커니즘 속에 있음을 주장한다.
더 나아가 사바하는 현대 사회의 다른 권력 메커니즘과 종교적 권력의 유사성을 암시한다. 신도들이 맹목적으로 교주에게 복종하는 양상은 소비자·시민·대중이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태도와 닮아 있다. 감독은 이를 통해 '맹신의 구조'가 종교에 한정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어떤 시스템이든 불안과 공포를 먹고 성장할 수 있으며, 그 시스템은 결국 인간의 존엄을 소모한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던지는 윤리적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그리고 그 믿음이 누구에게 이득을 주는가? 사바하는 단순히 교주를 비난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관객 자신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위안과 안전을 '대리'에게 맡기려 하는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박목사의 태도는 개인적 책임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윤리적 메시지다.